삼황오제(三皇, 五帝)
요순시대
하나라(夏) 우왕 걸 / 말회 傾國之色
상나라(商) 탕왕 주 / 달기 酒池肉林
포락지형
주나라(周) 무왕 유 / 포사 봉화
동주 시대
춘추 / 전국시대
BC 403년
2) 백이와 숙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 |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 ” |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 |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 ” |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중국 문화권의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백이와숙제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에 살았던 사람
백이와 숙제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호와 형과 동생이라는 이름의 합한것임
부친인 왕이 숙제를 왕으로 삼으려 하자 숙제는 형이 있는데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집을 나가고, 형인 백이는 부모님의 뚯이 동생에게 있는데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사양 하면 서 집을 나감
어부지리로 둘제가 왕이 된다
- 백이와 숙제의 대한 공자 평가: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원한을 생각 하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이 이때문에 거의 없었다
- 그들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 사마천은 그들이남긴 시를 통하여 공자의 생각을 반박함
3) 爲己之學, 爲人之學 : 공부는 자기를 위하여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