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신극과 신파극의 차이

수멍통 2023. 9. 7.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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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적(正統的) 신극(新劇)》
근대극 초창기에 일본과 한국에서는 신연극, 신파극, 신극이란 용어가 통용되었다. 그런데 신연극이란 말은 단순히 새로운 연극이란 의미 이외에 일본의 경우 초기신파를 가리킨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창극(唱劇)을 지칭한 특수용어였다. 그리고 신극이란 말도 광의(廣義)로는 고유의 전통극이 아닌 서양적 형태의 새로운 연극이란 뜻으로 쓰기도 했지만 협의(狹義)의 의미로서는 신파가 아닌 19세기 이후의 서양적 사실주의를 수용한 연극이란 말이었다. 즉 19세기 후반에 서양에서 발생한 사실주의극을 일본과 한국에서 받아들인 것을 신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연극사에서 볼 때 이른바 리얼리즘을 지칭하는 신극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약간씩 다르지만 1921년 여름에서부터 기산(起算)한다. 즉 김우진(金祐鎭), 홍해성(洪海星), 조명희(趙明熙), 고한승(高漢承), 김영팔(金永八) 등 동경유학생들이 1920년 봄에 근대극 연구써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이들 중 일부가 다음 해에 동우회순회극단을 발족시킨 것으로부터 기산한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비록 학생극단이고 또한 여름방학 동안만을 이용한 아마추어 연극운동이었지만 그들의 목표가 뚜렷이 반신파(反新派), 리얼리즘극의 추구였던 만큼 동우회의 연극운동은 일단 정통적 신극의 맹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이들이 공연한「김영일의 사(死)」(조명희 작)라든가 던세니경의「찬란한 문」등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극예술협회에서 또 한 갈래가 나와서 조직한 형설회순회극단도 동우회와 같은 성격의 학생극단으로서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도 일치했다. 그것은 그들의 레퍼터리였던「개성의 눈 ** 뒤」(조춘광 작)라든가「장구한 밤」(고영승 작) 등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에 이「장구한 밤」은 리얼리즘계열이었다.[註15]
고한승(高漢承)의 희곡과 형설회(螢雪會)의 공연은 사실주의연극을 지향한 경우로서, 김우진(金祐鎭), 조춘광(趙春光), 조명희(趙明熙) 등 동년배의 작가들과 함께 근대적인 인간성의 회복과 균등한 사회, 그리고 자유연애를 주제로 한 사회극이 그들이 추구한 작품세계였던 것이다.[註16] 그러나 어느 극단이나 연극인 보다도 1920년대에 본격적인 신극활동을 벌인 사람은 초성(焦星) 김우진이었다.
그는 비록 동우회순회극단 이외에 다른 단체활동을 벌인 일은 없지만 연극이론과 창작을 통해서 가장 오소독스하게 리얼리즘을 펼친 선구적 연극인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쓴 주요 논문인「자유극장이야기」, 「동경축지소극장에서 인조인간을 보고」등이라든가「피란델로」, 「오니일」, 「채펙」론 등을 보더라도 그는 리얼리즘극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했고,「이영녀」, 「산돼지」등 일련의 그의 희곡도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즉 그의 희곡세계는 격렬한 현실반영으로서 근대적 자각을 주조(主潮)로 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근대작가들이 추구했던 전통인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던가 여권신장이 강조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주조도 스트런드베리나 피란델로 이후 현대극작가들이 추구했던 공통적인 주제인 현실과 환각(幻覺)의 갈등이었던 것이다.[註17] 그는 또한 친구인 축지소극장의 배우 홍해성(洪海星)과 함께 소극장을 짓고 본격적 신극운동을 계획했으나 불행스럽게도 가수 윤심덕과 정사(情死)(1926)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본격적인 신극의 싹이 돋아나다가 주저앉는 꼴이 된 것이다.
김우진의 활동 외에도 작가로서는 김정진(金井鎭)이라든가 김영팔 박승희 등이 있었으나 보잘 것 없었고, 극단 토월회의 초기활동도 정통신극을 내걸고 한 것이지만 김우진의 활약과 비교할 때 그 의식에 있어서 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사상이 풍미함으로써 경향극단(傾向劇團)이 조금 생겨났는데, 그 첫번째가 1923년에 결성된 염군(焰群)이고, 다음으로 1925년에는 김남두, 최병한, 선열 등이 동경에서 프로극협회를 조직했으며 1927년에는 김동환, 김기진, 박영희, 조명희 등이 불개미극단을 조직하였으나 단 한번의 공연도 못가졌고, 단지 1927년 7월에 발족된 연학년(延鶴年)의 종합예술협회가 안드레프의「**맞는 그 자식」을 공연하였으나 3일만에 일본경찰이 중지시킨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프로극은 대중으로부터도 관심을 끌지 못한 데다가 일경이 또한 놓아두지를 않았다.
1920년대 초에 정통적 신극운동이 싹이 터서 김석진에 의해 처계화되다가 좌절되었고 토월회와 좌익극단 등이 간헐적으로 신극운동을 벌이는 듯 했으나 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신극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개화기의 서양문화는 일본을 통해 수용되었고, 일본의 경우 정통적인 신극운동은 1924년의 축지소극장에서 불이 붙음으로써 유학생들이 거기서 신극을 배워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 해외문학파 문인들이 본격적 신극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즉 1931년 7월에 발족된 극예술연구회가 바로 그것이다.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모체는 극영동호회(劇映同好會)라고 할 수 있다. 홍해성, 윤백남, 서항석, 류치진 그리고 이헌구 등이 중심이 되어 연극영화전람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극영동호회를 조직하고 1931년 6월 18일부터 일주일간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동사(同社) 옥상에서 4,000여 점의 연극영화의 참고자료(參考資料), 무대사진, 가면, 인형, 영화 스틸 등을 전시하여 성황을 이루었다.[註18]
극영동호회를 주최한 이들은 그대로 흩어지기도 아쉬웠고, 뭔가 해보자는 서항석(徐恒錫) 등의 요청으로 신극 연구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사도(邪道)에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을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발족된 극예술연구회의 창립회원은 김진섭(金晋燮), 류치진(柳致眞), 이헌구(李軒求), 서항석(徐恒錫), 윤백남(尹白南), 이하윤(李河潤), 장기제(張起悌), 정인섭(鄭寅燮), 조희순(曺喜淳), 최정우(崔珽宇), 함대훈(咸大勳), 홍해성(洪海星) 등 12명이었다.
창립회원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2명 중 윤백남과 홍해성 두 중진 연극인을 제외한 10명은 모두가 일본에서 영문학, 독문학, 불문학 등을 공부한 해외문학파들로서 연극에 경험이 없는 문인들이었다. 「관중, 특히 학생의 교도, 배우의 양성과 기성극계의 정화에 주력하고 신극의 수립에 필요한 일체사업을 기획」하겠다는 사업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극예술연구회는 직업극단이 아닌 연극교육과 연구단체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단체였다. 그들은 곧 연극인양성을 위한 제1회 하계강습회(夏季講習會)를 열었는데 이해남, 윤태임, 심영, 박제행, 김영일 등 22명이 참가했다. 이 때의 강습과목을 보면 연극론, 희곡론, 동서희곡과 연극사, 배우론, 연출과 무대효과론, 대사론, 분장, 발성, 표정, 기본체조 등으로서 연극의 기초분야였다.
이들은 또 대중계몽을 위해 강연회도 개최했는데, 강사는 모두가 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연극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강습회를 열었고, 신극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강연회를 열었으며 신파로 대변되던 당시 극계 정화를 위하여 평론활동도 강화시켰던 것이다. 그들이 성토(聲討)한 연극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연극사, 신무대, 태양극장 등 신파극단들의 통속극으로서 그 세속화 경향을 매도했다. 이들의 대중극에 대한 비판은 동양극장 시대에까지 지속되어서 대중연극계와는 항상 반목관계에 있었다. 기성연극인들로부터 극연회원들은 공회당배우이고 자기들은 극장배우라고 했던 것은 그 단적인 예였다.
여러 각도에서 준비과정을 거친 극예술연구회는 이듬해 5월 직속극단 실험무대를 두고 제1회 시연회를 조선극장에서 가졌다. 제1회 공연작품은 고골리의「검제궁(檢祭宮)」(홍해성 연출)이었는데 대성공이라는 평을 받았다. 대성공의 이유는 각본 선택의 현명했던 탓이고 연출의 심각미와 세련미도 돋보였으며 토월회에서 처음으로 상연한「부활」이나「하이델베르히」이래 10년만에 보는 최대의 수확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註19] 제1회 공연이 성공하자 자신을 얻은 극연은 계속해서「관대한 애인」(어어빙 작),「옥문」(그레고리부인 작),「해전(海戰)」(괴에링 작),「기념제」(체호프 작) 등 번역극과 류치진의 창작극인「토막(土幕)」을 공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들은 류치진의 현실고발의 창작극과 근대극계통의 번역극을 조화시켜가며 공연했다.
우리나라 희곡사에 있어서 사실주의극이 뿌리를 내리는 시기도 바로 이 때였던 것이다. 그러나 류치진의 현실폭로적인 사실주의극도 일제의 탄압으로 그 예봉(銳鋒)이 꺾이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은 창작극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번역극에 대한 검열도 심했기 때문에 웬만한 작품은 공연이 허가되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도 그들은 착실한 연극활동을 펴나갔다. 당시 최고 연출가였던 홍해성 주도로 부지런히 공연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1935년에 동양극장이 세워지면서 생활고를 못견딘 홍해성은 동양극장 전속연출가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 바톤을 류치진이 맡게 되었다. 류치진은 창작과 연출을 겸하면서 서항석의 경영과 조화를 이루었다. 1931년부터 1934년말에 홍해성 연출의 극예술연구회 제1기가 끝나고 1935년부터 류치진의 제2기가 시작되었는데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일제가 극예술연구회를 사상단체로 보고, 동인들을 민족사회주의자로 몰았기 때문이다. 연구회란 꼬리가 달린 것이 일제의 주시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극예술연구회는 18회 공연을 끝으로 1938년 3월에 일단 해체되면서「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인 극연좌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인들도 대부분 단체를 떠났고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류치진과 서항석 등 몇 사람만이 남아서 직업극단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본격 직업극단으로서「부활」(톨스토이 원작)등 대중적 레퍼터리 선정과 영화부(映畵部)도 두었던 극연좌는 대중과 영합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오래 지속못하고 결국 만1년만인 1939년 5월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1931년 7월에 발족한 이래 1939년 5월까지 만 8년 동안 대중적인 신파극과 맞서서 이 땅에 정통적 신극인 리얼리즘을 뿌리 내리게 한 극예술연구회는 근대적인 번역극 24편과 훌륭한 창작극 1편을 공연하고 많은 연극인도 배출해 냈다. 극예술연구회의 해체로 정통 신극활동은 일단 좌초(坐礁)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래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안(國歌總動員法案)을 만들어 모든 예술단체를 어용화하기 시작하며 1941년에는 일본연극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연극 영화의 검열도 강화되었다. 그들 지배하에 있던 우리에게는 더욱 심하게 가해졌다. 즉 1940년 12월에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어 모든 연극단체(아낭 등 9개극단)를 산하로 끌어들이고 국민연극이라는 이름의 어용극(御用劇)을 하도록 강요했다.
배우들에게 징용면제 같은 특전(?)을 주면서 일어극(日語劇) 강요 등 국책극(國策劇)을 권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류치진 서항석 함대훈 등이 현대극장을 조직(1941년)했으나 본격 신극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일제의 강요에 못이겨 국민극 이론을 전개하면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에 부합된 작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류치진의「북진대(北進隊)」, 「흑룡강」등이라든가 함세덕의「추장 이사베라」「에밀레종」같은 친일어용극(親日御用劇)이 공연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문화예술에 대한 통제는 가혹한 것이었다. 따라서 1940년대는 순수니 대중이니 또는 정통 신극이니 신파극이니 구별지을 수도 없을 정도로 연극은 모두 일제의 문화통제정책 밑에서 친일어용화에 여념이 없었다. 이름하여 연극의 암흑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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