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셔먼호 사건

수멍통 2023. 10. 23.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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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이하 셔먼호)는 미국의 민간상선입니다. 배의 이름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서 맹활약한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서 따온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군의 기반시설을 개박살 내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해서 남군으로부터 ‘북부의 악마’, ‘파괴자 양키’라는 악명을 얻었지요. 여담으로 2차 대전 당시의 전차인 M4셔먼도 이 사람 이름을 따온 건데 그를 증오하는 남부 출신 병사들이 탑승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여하튼 셔먼호는 1866년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까지 진입합니다. 당시는 서구열강들이 이익을 얻으려고 아시아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데 혈안이 되었던 시기지요. 셔먼호 역시 기본적인 기조는 무역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 망원경, 자명종 등을 팔려고 한 것이지요.

당시 평안도 관찰사는 개화파의 시조로 꼽히는 박규수였습니다. 개화를 중시한 만큼 내심 무역을 원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지위로 멋대로 통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1866년은 천주교인들을 탄압하는 병인박해가 있던 해입니다.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들도 다수 순교해 당시 조선에서는 프랑스가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 상태였지요. 즉, 조선의 배외감정이 한창 드샐 때입니다.

박규수는 무역은 거부했지만 아량을 베풀어 먹을 게 떨어진 셔먼호에 쌀과 고기, 채소 등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배외심이 심하긴 했어도 일단 당시의 조선의 매뉴얼적 대응은 적당히 먹을거 주고 돌려보내라였거든요. 그런데 이놈들은 먹을 걸 받아먹고도 돌아가지는 않고 평양의 만경대까지 올라가는 등 행패를 일삼았습니다. 심지어 박규수가 사절로 보낸 중군(장교) 이현익을 납치하기까지 하지요.

결국 박규수는 강제로라도 쫓아보내야겠다고 군대를 보냈는데, 당시 신식함포 2문을 장착한 셔먼호는 포격을 감행합니다. 조선의 대포는 사정거리가 짧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지요. 이 과정에서 구경하던 민간인 7명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평양 백성들은 분기탱천하여 화살을 쏘고 돌팔매질을 합니다. 이에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붙잡은 이현익을 풀어주지요.(혹은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몰래 배에 숨어들어가 이현익을 구출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제 배 안에 포로도 없겠다,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 부은 나무배들을 셔먼호에 충돌시켜 화공을 펼칩니다. 마침 강의 수위가 낮아져 셔먼호는 선체가 바닥에 닿아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었지요.

화공 결과 대부분의 선원이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당시 선교를 목적으로 셔먼호에 탑승하고 있던 토마스 목사 및 몇몇 선원이 어찌어찌 헤엄쳐서 올라오기는 했습니다. 박규수는 이들을 포로로 잡아서 이후에 협상에 쓰고자 했지만 성난 백성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지요.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도 백성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훗날 미국은 이 사건의 책임을 구실 삼아 쳐들어옵니다. 바로 신미양요지요. 여기서 주의할 게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5년 뒤에나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병인양요가 병인박해와 같은 해에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좀 헷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두 사건의 간격이 이렇게 벌어지는 이유는 셔먼호가 민간 상선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정부의 지시로 평양에 갔던 것이 아니고 생존자도 전혀 없었기에 미국은 오랫동안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요. 애초에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미국이 굳이 개입하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의 뒤처리가 급선무였기에 대외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힘들기도 했고요.

뒤늦게 소식을 접한 미국 정부는 사건 파악을 위해 1867년 와세트호, 1868년에 셰난도어호를 파견합니다. 이때는 조선이 금지한 개항이 목적도 아니었고 단순히 진상파악을 위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지요. 셰난도어호 방문 때는 조선이 공식으로 문서를 보내 셔먼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기도 합니다. 이후 의회에서 회의도 하고 동아시아 책임자인 베이징 공사에게 서한도 보내고, 군사도 정비하는 등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두 사건 사이에 5년이란 시간차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어찌되었든 진상파악을 한 미국은 배가 불타버린 항의(명목)도 하고 강제 개항 요구(본심)도 할 겸 1871년에 군대를 보내니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신미양요의 원인 정도로만 배우지만 북한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사건 당시 조선 군대를 통솔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수령님의 가문이 오래전부터 조선을 위해 투신하였고 그 피를 이어받은 김씨들 역시 비범한 핏줄을 타고났다라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미국이니 이보다 더 좋은 프로파간다는 없지요.

물론 이건 그쪽만의 주장이고 쌩거짓말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당시 최고 책임자는 박규수였고 조선 측 기록 어디에서도 김응우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김응우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도 명확히 확인되는 게 아니지요. 물론 그들이 중요시하는 건 사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그릇된 자부심을 내세울 수 있는 왜곡된 역사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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